느낌이 있는 좋은시. 좋은글

어제 -박정대-

개미소녀 2012. 8. 16. 07:30

지난 눈부신 봄날에 금진항 어디쯤엔가 눈부시던 벗꽃


어제

박정대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

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복사꽃 비 오듯

흩날리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 취하라, 劉伶도 죽으면

마실 수 없는 술이거니!>, 李賀의 <將進酒>를 중얼거리다가 끝

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

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

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

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나 보고 싶

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

악만이 푸르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푸른 음악의 한가운데로

별똥별들이 하얗게 떨어지고, 메마른 섬 같은 가을도 함께 뚝

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정신을 가다듬고 내 낡은 기타를

매만질 때, 너는 서러운 악보처럼 내 앞에서 망연히 펄럭이고

있었다

어제는 너무 심심해 오래된 항아리 위에 화분을 올려놓으며,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포개어져 오래도록 같이 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다, 새우젓 장수가 지나가든 말든, 우리의 생이 마

냥 게으르고 평화로울 수 있는, 일요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

각을 했다

어제는 두툼한 외투를 껴입고 밤새도록 몇 편의 글을 썼다,

추운 바람이 몇 번씩 창문을 두드리다 갔지만 너를 생각하면,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속 톱밥 난로에 불이 지펴졌다, 톱밥

이 불꽃이 되어 한 생애를 사르듯, 우리의 生도 언젠가 별들이

가져가겠지만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한때 아픈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나는 술도 못먹고 무엇으로 다스릴수 있을까

네 생각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음악을 들어도 보고

책을 읽어도 보고 허허롭게 웃어보기도 하지만

내마음에 오지말라고 그토록 애원을 해봐도

마음 한가운데 떡 버티고 나가지 않는 너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