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좋은시. 좋은글

가을편지 -고정희-

개미소녀 2012. 9. 13. 07:12

담양환벽당의 꽃무릇 -사진 차꽃님-

 

가을 편지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해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을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 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 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사람의 마음은 길이 없어도 잘도 흘러간다

흐르지 못하는 곳이 없다

네게로 가는 길을 막아도 거침없이 흘러가는 내마음의 강물

나도 어쩔수가 없다

막을수가 없다

누군가 커다란 둑을 쌓고 막아주었으면...

가을이 오고 있나보다

저 서늘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따라서 나도 네게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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