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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단상

개미소녀 2011. 12. 29. 16:43

낡은 자전거
    
           - 안도현

너무 오랫동안 타고 다녀서
핸들이며 몸체며 페달이 온통 녹슨 내 자전거
혼자 힘으로는 땅에 버티고 설 수가 없어
담벽에 기대어 서 있구나
얼마나 많은 길을 바퀴에 감고 다녔느냐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알수록
삶은 여위어가는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자전거야
자전거야
왼쪽과 오른쪽으로 세상을 나누며
명쾌하게 달리던 시절을 원망만 해서 쓰겠느냐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자전거에 관한 명상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가네
길은 어제 내린 비로 온통 흙탕이네
하지만 나는 이 길을 피할 도리가 없네
되돌아갈 수야 없지 않은가
나는 힘껏 페달을 밟아
흙탕으로 들어서네
흙물이 튀어 옷을 적시고 등에까지 튀어 오르네
까짓 흙탕쯤이야 털고 씻으면 되지 않나
겨우 진창길 빠져 나오니
울퉁불퉁 돌길이네
강가에 서 있는 힘찬 갈대들이
그제야 눈에 뜨이네
마른 풀 서 있는 저 강둑길에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내 모습 길게 비치네
기우뚱한 내 그림자
바로 세우고
나는 더욱 힘껏 페달을 밟아가네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가네
(이동순·시인, 1950-)

 

 자전거

내리막길에서는 가속이 붙는다
페달은 밟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마음은 놓을 수 없다
균형은 잡아야 하고, 뜻하지 않은
사태에도 대비해야 한다

바큇살에 반짝이는 석양
이따금 찌렁찌렁 울리는 방을

언덕길 막바지에서 해가 지고
결국은 쓰러질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편안히, 제법 상쾌한 기분으로
관성에 몸을 실어
가을 석양의 언덕길을 굴러 내려간다

아슬아슬한 균형도 잡으면서
한가로이 이따금 방울도 울리면서
(김종길·시인, 1926-)


 자전거 타고 가는 길

저문 시골길을 민간인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시골의 길들이 그러하듯이
인생의 길들은 비포장이다
길 양켠 웃자란 고추밭 위로 털뭉치 같은 어둠이
툭툭 떨어져 쌓인다
저 아래 물이 가득 찬 금광저수지에 뜬 달은
은박지를 오려붙인 것 같다
달 아래 새들은 세계의 어떤 쓸쓸한 징표처럼 날아간다
뻑뻑하기만 한 가난도 조금은 헐거워지는 밤
어디선가 아이가 자지러지게 운다
(장석주·시인, 1954-)

 


 푸른 나무 그늘 밑의 자전거

어디든
마음 내키는 곳에서
머물렀다 가길 바라던
지난 날 나는
삶이
자전거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빨리 가다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엉덩이 사이에
작은 의자를 끼우고
넘어질 듯 뒤뚱거리면서
잘도 굴러가는 은빛 바퀴

다투어 새잎이 피어나는
가지 아래
얌전히 놓인
신사용 자전거는 누구의 것일까
건너편 부동산 아저씨가 받쳐놓았을까

너와 함께
그늘에 앉아
푸른 오후를
기다리고 싶다
(고성만·시인, 전북 부안 출생)


 자전거 타는 사람 - 김훈의 자전거를 위하여

당신의 다리는 둥글게 굴러간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무릎으로 발로 페달로 바퀴로
길게 이어진 다리가 굴러간다
당신이 힘껏 페달을 밟을 때마다
넓적다리와 장딴지에 바퀴 무늬 같은 근육이 돋는다
장딴지의 굵은 핏줄이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근육은 바퀴 표면에도 울퉁불퉁 돋아 있다
자전거가 지나간 길 위에 근육 무늬가 찍힌다
둥근 바퀴의 발바닥이 흙과 돌을 밟을 때마다
당신은 온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비포장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헝클어뜨린다.
당신의 자전거는 피의 에너지로 굴러간다
무수한 땀구멍들이 벌어졌다 오므라들며 숨쉬는 연료
뜨거워지는 연료 땀 솟구치는 연료
그래서 진한 땀 냄새가 확 풍기는 연료
당신의 2기통 콧구멍으로 내뿜는 무공해 배기가스는
금방 맑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달달달달 굴러가는 둥근 다리 둥근 발
둥근 속도 위에서 피스톤처럼 힘차게 들썩거리는
둥근 두 엉덩이와 둥근 대가리
그 사이에서 더 가파르게 휘어지는 등뼈
(김기택·시인, 1957-)

 

 2인용 자전거 타기

결혼이란 안장과 체인이 두 개 달린 자전거를 타는 일이지
앞사람이 페달을 밟아 뒷바퀴를 끌면
뒷사람은 발을 맞추면 된다네
마음이 합쳐지지 않으면 바퀴는 구르지 않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다 보면
두 바퀴는 물고 있던 체인이 쉽게 벗어나기도 한다네
그럴 땐 자전거를 세우고 다시 체인을 걸어야 하지
앞바퀴와 뒷바퀴를 묶으며 기름때를 묻히기도 한다네

한 번 벗어난 체인은 쉽게 고정되지 않지
시간을 흘리며 생을 낭비하기도 한다네
짐이 돼버린 자전거를 끌며 서로를 원망하기도 하지
지쳐 있는 두 사람은 목적지가 멀기만 하다네

각자 길을 되돌아보며
바퀴에 감긴 시간을 계산해 보기도 한다네
그러다가 문득 뒷바퀴를 돌려서 앞바퀴를 굴릴 생각을 하지
때로는 뒷바퀴가 앞바퀴를 밀고 가기도 한다네
(문숙·시인, 1961-)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 되리
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 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
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파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
가위가 광목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
바람을 찢어발기진 않으리
나 어느 날은 구름이 머문 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
또 어느 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
종아리는 딴딴해지리
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르르 풀고
페달을 헛돌게도 하리
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바큇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으리
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에도 찾아가리
언덕이 가팔라 삼십 년이 더 걸렸다고 농을 쳐도 그녀는 웃으리
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뒷짐 지고 휘파람을 휘휘 불리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안도현·시인, 1961-)


 오래된 자전거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마른 풀잎에 앉은 잠자리처럼
자전거에 가볍게 올라앉아 있다
자전거는 스스로 페달을 밟아
삐꺽거리며 언덕길의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바람이 뒤에서 불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몸은 요람에 누운 아이처럼
가볍게 앞뒤로 흔들렸다
언덕길의 정점에 다가가자
할아버지의 양쪽 겨드랑이에서 잠자리 날개 같은
투명한 날개가 돋아났다
마른 풀잎에 앉았던 잠자리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할아버지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제 자전거는 혼자서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언덕 아래에는 오래된 자전거들이 옆으로 쓰러져 누워 있었다
옆으로 누운 자전거의 바큇살에
저녁 어스름이 대머리 독수리처럼 엉켜 붙고 있었다
(김승강·시인, 1959-)


 자전거

자전거를 하나 갖고 싶다
차를 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를 비웃을지 모르지만
바퀴와 페달만 괜찮다면 브레이크만 이상 없다면
헌 자전거라도 상관없으리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얼굴이 잘생긴 것은 아니지만
눈이 노루처럼 선한
긴 생머리의 여자라면 더욱 좋겠다

아무도 모르게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그 여자가 사는 마을길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날이 늘어간다면
나는 더 행복해질 수도 있으리
내가 나를 잊어버리게 참 하늘빛이 곱고도 맑은
그녀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써서
책갈피에 꽂아두는 날도 생기게 되리

멀리서 본 그 여자, 복숭아꽃을 닮은 여자
새참 때 미리 맞춰 광주리 머리에 이고
논둑길 따라 걸어가는
들꽃 이름을 나보다도 더 많이 아는 여자
갈수록 보리가 푸르러갈 때
저문 마을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가 지나간다면
빨랫줄에 널어둔 마른 빨래를 개며
앉아서도 들길이 훤히 다 내다보이는 툇마루에서
그 여자 무슨 생각을 할까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유채꽃밭에서
유채를 꺾어먹던 시절부터
당신을 좋아했노라고, 편지에 쓸 수는 없으리
나비가 훨훨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당신 생각이 간절해졌다고
소쩍새 우는 밤하늘에 은하수 별이 되고 싶다고
분홍색 편지지에 적을 수는 없으리

그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싶다
짐받이 뒤에 그녀를 태우고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갈 수만 있다면
구름이 뭉실뭉실한 산마루 언덕까지라도
다 달려가고 싶지만
산죽밭 끼고 강물 돌아 흐르는 물가까지 가서
소풍처럼 그녀와 점심을 먹으리라
이것이 내 평화라고, 유토피아라고
강물에다 대고 물수제비를 띄우며
까르르, 소리 지를 수도 있으리

자전거를 하나 갖고 싶다
그녀가 살던 옛집 마당에도 살구꽃 피고
달빛 환하게 감꽃이 털리는 밤.

어디든 달려갔다가 멈추고 싶은 곳에 멈출 수 있는
안마당에 괴어 놓은 자전거 한 대가 바로
나의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명국·시인)


 자전거

번들거리는 자전거를 샀네
고목처럼 쓰러지지 않고 잘 배워
무사히 타게 될지 마냥 두렵네
날마다 힘겹게 달리는 석탄 기관차에서 고개를 내민
얼굴 까만 기관사가 너무 눈부셔
언젠가는 나도 저 자리에 앉아
세상을 달려보리라 생각했던 나
또 어느 땐가는
하늘 높이 나는 비행기를 아득히 올려보면서
하얀 빛살에 몸 싣고 세월을 나르리라 다짐도 했었네
그러나 잎 지는 가을날
땅 위에서 두 발로 비행기보다 더 빨리 달려온 내가 발견됐을 때
나에게는 이미 한 대의 헌 리어카도 없었네
가슴 깊숙이 유년을 감추고
이제야 서서히 구르는 자전거를 들여놓은 나
며칠이 지나도 기억에 붙잡혀
손바닥만한 자전거 안장에도 한 번 오르지 못하네
손잡이만 반짝거리고 있네
나, 지금이라도 자전거를 굴리면
바퀴살에 햇살이 실려서 돌아갈지
머리 속에서 바퀴만 돌고 있네
(박명용·시인, 1940-)



 자전거 체인 소리

그 아이는 두 발 자전거를 탄다
발이 잘 닿지 않는 페달을 밟으며 몸이 쏠리며
삐뚤삐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바퀴살을 돌린다
아이는 쌩쌩 자전거를 잘 탈 수 있는 날을 당기며
자신의 중심을 향해 달려간다
아슬아슬 끝없이 멀어지는 아이의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나는 체인 소리가 참 좋다
나는 그 아이만 볼 때도 있다
아이가 굴리고 가는 바퀴살만 볼 때도 있다
짐칸에 앉아 아버지의 허리를 껴안던 아이
고정시킨 자전거를 타고 페달 밟는 연습을 하던
그 길을 가르며 다시 자신의 중심을 향해 돌아올 아이
어제는 자전거 의자의 빗물을 손으로 쓱 훑어내며 서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비에 젖지 않게
얼른 방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맨몸으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은 불안해, 걱정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늦은 시간까지 아이의 우산이 씌워져 있던 자전거
빗속을 자전거와 함께 한참을 서 있던
그 아이가 굴리고 가는 맨발의 체인 소리가 참 좋다
아이가 지나간 뒤 한동안 몸 흔들고 있는 강아지풀
떨리지 않고 흐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강미정·시인, 경남 김해 출생)

 

無의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두 개의 은륜이 굴러간다.

엔진도 기름도 없이 오직 두다리 힘만으로

은륜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 텅 빔이 바퀴살과 페달을 존재하게 하고

비로소 쓸모 있게 한다.

텅 빔의 에너지가 자전거를 나아가게 한다.

나는 언제나 은륜의 텅 빈 중심을 닮고 싶었다.

은빛 바퀴살들이 텅 빈 중심에 모여 자전거를 굴리듯

내 상상력도 그 텅빈 중심에 바쳐지길

그리하여 세속의 온갖 속도 바깥에서

찬란한 시의 月輪을 굴리기를 꿈구어 왔다.

놀라워라, 바퀴 안의 無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희망의 페달을 밟게 한다.

바퀴의 내부를 이루는 무가 은륜처럼 둥근 생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구르는 은륜 안의 무로 현현한 하늘이, 거센 바람이 지나간다.

대붕의 날개가 놀다 간다.

은륜의 비어 있음을, 무를 쓸모 없다 비웃지 마라

그 텅 빈 중심이 매연도 굉음도 쓰레기도 없이

시인의 상상력을 굴린다.

비루한 일상을 날아올라 심오한 정신의 숲과 대지를 굴리고

마침내 우주를 굴린다.

길이여, 나를 태운 은륜은 게으르되 게으르지 않다.

무의 페달을 밝으며

내 영혼은 녹슬 겨를도 없이 自轉하리라 (시인 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