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도현-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하소서.
사랑한다는 것 -안도현-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 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오래 고통받은 사람은 -이성복-
오래 고통받은 사람은 알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쳐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 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 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은 사람은 알것이다.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볼,
오래 고통받은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불길 -김용택-
지금
내 마음은 불입니다.
불이어서 타는 두렴움을 모릅니다.
혼신을 다해 탈 뿐입니다.
잡지 못하는 이 불길이 두렵습니다
우리에겐 불이 아니고
언 강 밑으로 흐르는 물이 되어도 좋을 것을.
내 물길은
언 강 밑으로 흐르지 못하고
강둑에서 불로 타오르며 번져만 가니
아, 아
나는 당신을
이 불길로 당해낼 재주가 없어요
내사랑 -김용택-
당신은
내 깊은 잠을
문득 문득 꺠웁니다
당신은
바삐 걷는 내 발길을
문득 문득 멈추게 합니다
당신은
문득 내 생각을 가져가 버리고
문득 내 말문을 닫게 합니다
당신은, 그런당신은
어떤 사람들이 용공이라 해도
내 사랑입니다
사랑 -황학주-
혼자 사는 사람이니까 집 밖에서 햇빛을 더 보고 싶은 나는
꿈이 서럽도록 가벼우니까
날이 얇으니까 깊이 찔러넣은 꿈일 줄 모르고
사랑은 피흘리는 동작이니까 밤새도록 비닐봉지 같은
정신의 가운데가 마구 째진 다음
뛰쳐나와 겨울에 밖에다 얼려서 한 숟갈씩 뜨는 눈물방울들이
뭉개진 고구마 살처럼 진하고 큰 줄 모르고..
비의 사랑 -문정희-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
물이고 싶다.
물보다도 더 부드러운 향기로
그만 스미고 싶다
당신의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의 끝까지
적시고 싶다
그대 잠속에
안겨
지상의 것들을
말갛게 씻어 내고 싶다
눈 틔우고 싶다.
해열제 -이정록-
그대 보고 싶을수록
늪이 생각납니다
늘 젖어 있는 뿌리
비늘마다 물이끼 푸르른 물고기들
지느러미를 세운 채 알을 낳고
넓은 이파리 위론
배때기 하얀 개구리가
깜짝 뒷다리를 감추는 오후
하늘 한자락
콱 베어물고 우거지는 늪
깊은 가슴을 생각합니다.
내 마음 속,
악어의 이마가 펄펄 끓습니다.
목숨의 노래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도종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가슴을 저미며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눈물 없이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벌판을 지나
벌판 가득한 눈발 속 더 지나
가슴을 후벼파며 내게 오는 그대여
등에 기대어
흐느끼며 울고 싶은 그대여
눈보라 진눈깨비와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쏟아지는 빗발과 함께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견딜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던 시간을 지나
시처럼 오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닌지도 몰라
사랑하는 사람 -박재삼-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
기껏해야 한 칠십년
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
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
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
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
나는 꺼져갈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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